안녕하세요, 11년 차 디자이너 리틀아틀리에입니다.
입시 준비를 하던 시절, 저는 참 순진했습니다. 가, 나, 다군 지원 기회 3번을 모두 ‘서양화과’에 쏟아부었죠. 그림으로 먹고살려면 당연히 순수미술을 전공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대학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부터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오늘은, 미대 졸업하고 11년 동안 현업에서 구르면서 그때는 왜 아무도 안 알려줬을까 싶었던 이야기들을 좀 풀어보려고 합니다.
1. 미대 나오면 다 그림으로 먹고사는 줄 알았다 (현실은 달랐다)
가장 먼저 마주한 진실은 순수미술 전공은 ‘돈 버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음에도 제가 택한 ‘서양화’ 전공은 실상 ‘현대미술 작가’가 되는 길이었죠.
그림을 그려서 먹고살고 싶었던 저에게 대학 교육은 너무나 철학적이고 모호했습니다. ‘그림으로 밥벌이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차라리 디자인과를 갔어야 했다는 사실을 대학생이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2. 전공과 현업의 간극, 그리고 뜻밖의 ‘유턴’
많은 동기가 ‘디자인 복수전공’으로 눈을 돌릴 때, 저는 안정적인 길을 찾겠다며 교직 이수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4학년 교생 실습을 나간 뒤 뼈저리게 느꼈죠.
“아, 나는 교사 체질이 아니구나. 그리고 장기 수험 생활을 감당할 현실적인 여건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졸업 직전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순수미술만 했던 저에게 세상은 냉정했습니다. 결국 실패를 맛보고 졸업하던 해 1월, 저는 무작정 **’디지털 드로잉’**을 시작했습니다. 손그림만 그리던 제가 타블렛과 PC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면서 게임회사 배경 원화가로 방향을 틀었고, 다행히 기본기가 있었기에 비교적 쉽게 취업 문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 팁: 캐릭터는 소위 ‘덕후 기질’이 충만해야 유리하지만, 배경 원화는 탄탄한 기본기만 있다면 의외로 허들이 낮을 수 있습니다.
3. 그림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 커뮤니케이션과 마감
회사는 갤러리가 아닙니다. 그림이 ‘예술’이 아니라 **’일’**이 되는 순간, 직장 생활의 룰이 적용됩니다.
- 마감의 연속: 스케줄링에 따라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 커뮤니케이션: 내가 그리고 싶은 게 아니라 기획자가 ‘그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정확히 구현해야 합니다.
- 협업: 동료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톤을 맞춰야 하죠.
그래도 내가 가진 재능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건, 이 삭막한 사회에서 정말 큰 축복입니다.
4. 천재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버틴 사람이 살아남는 것
저는 재능형 인재가 아니었습니다. 학부 시절 동기들 사이에서 제 재능은 하위권에 가까웠죠. 그런데 놀랍게도 10년이 지난 지금, 동기 중 그림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딱 셋뿐입니다. 전문 웹툰 작가가 된 동기 둘과 저뿐이죠.
나머지 제가 부러워했던 재능형 동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대부분 다른 길을 찾았습니다. 재능이 많다고 오래 가는 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림 그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버틴 사람들이 프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참 감사합니다
저같이 특별한 재능이 없는 사람도 연습과 지속성만 있다면 충분히 그림으로 밥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계를 호령하는 아티스트가 목표라면 재능이 절대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림으로 밥벌이하는 프로’**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도달 지점은 누구나 시간의 차이일 뿐 비슷합니다.

매일 앉아서 일 하는 책상. 오늘도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결론: 재능 탓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엔 아마 미대생, 졸업 예정자, 혹은 그림을 진로로 고민 중인 분들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그림이 뜻대로 안 그려져서, 혹은 비전공자라 망설이고 계신가요?
11년 차인 제가 장담하건대, 결국 끝까지 펜을 놓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거창한 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오늘 하루의 밥값을 벌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충분히 멋진 아티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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