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디자이너’라는 타이틀로 밥을 벌어먹고 살고 있지만, 사실 제 인생에는 그림을 완전히 놓아버릴 뻔했던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요즘 그림 좀 안 그려지네?” 수준의 슬럼프가 아니었습니다. 진지하게 토익 책을 사고 공무원 시험이나 일반 사무직 취업을 준비하며, 제 인생에서 ‘그림’이라는 단어를 통째로 삭제하려고 했던 시기였죠.
혹시 지금 그림이 재미없어졌거나, **‘그림 포기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면 아마 저와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은 그림 슬럼프나 그림 포기를 고민하고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적었습니다. 오늘은 화려한 포트폴리오 뒤에 숨겨진, 제가 재능의 벽에 부딪혀 도망치려 했던 비겁하고도 치열했던 기록을 공유해보려 합니다.
1. 선택지가 없어서 시작했던 ‘미술 입시’라는 트랙
저는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거창한 예술적 포부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끄적거리는 걸 좋아했을 뿐이죠.
하지만 한국의 미술 입시 구조는 생각보다 견고합니다. 한 번 그 트랙에 올라타면 중간에 내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특히 미술 입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진로를 바꾸기 어려운 구조 속에서 더 큰 고민을 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2, 3학년이 되면 설령 마음이 바뀌더라도 현실적인 대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십 대 시절 전부를 화실에서 보냈는데, 이제 와서 수능 공부만으로 일반 대학에 가기엔 너무 늦었다는 공포가 엄습하죠.
저는 그렇게 **‘다른 길에 대한 목마름’**을 억지로 누른 채 관성처럼 미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2. 미대에서 마주한 ‘재능’이라는 거대한 벽
대학 입학의 기쁨은 딱 일주일이었습니다. 동기들의 과제물과 습작을 마주한 순간, 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여기서 절대로 재능으로 먹고살 수 있는 부류가 아니구나.”
세상엔 정말 ‘괴물’ 같은 천재들이 많았습니다. 선 하나만 그어도 아우라가 느껴지는 친구들 사이에서 저는 늘 초조했습니다. 저처럼 ‘나는 그림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전 글에서도 고백했듯이, 저는 성실함으로 그 격차를 메워야만 하는 ‘노력형’이었습니다. 남들이 한 장 그릴 때 세 장을 그리고, 잠을 줄여가며 숙련도를 쌓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간신히 따라가는 실력은 저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참고 글 – [미대 전공 후 그림으로 먹고살며 알게 된 현실]
3.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닌데…”
더 큰 혼란은 교육 과정에서 왔습니다. 미대 교육의 뿌리는 대부분 ‘순수 미술 작가’ 양성에 가깝습니다. 교수님들은 늘 ‘작품 세계’, ‘자기표현’, ‘철학적 고찰’을 강조하셨죠.
하지만 저는 애당초 고고한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그림 진로’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 그림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에게는 ‘작가’와 ‘직업인’의 방향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보다, 타인이 필요로 하는 그림을 그려주고 그 대가를 받는 ‘직업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학교의 방향과 제 방향이 어긋나기 시작하자 엄청난 현타가 찾아왔습니다.
4. 재능이라는 이름의 비겁한 핑계
당시 제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은 “난 재능이 없어서 안 돼”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말은 참 편리한 도피처였습니다.
🔥 “재능이 없다는 말은, 사실 도망치기 가장 쉬운 핑계였습니다.”
재능이 없다고 규정해버리면,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생깁니다.
🔥 재능은 출발선의 차이일 뿐, 포기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림에도 100% 집중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버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떠다니던 시기였습니다. 그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교직 이수’였습니다. 하지만 4학년 교생 실습을 나가서 아이들을 마주했을 때 깨달았습니다. “나는 지금 도망치고 있는 거구나.”
5. 토익 책 앞에서 마주한 진짜 내 모습

졸업을 앞둔 4학년 2학기, 저는 결국 붓을 내려놓았습니다. 토익 공부, 자격증 준비, 스펙 쌓기. 남들 다 하는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니 마음은 편했습니다. “남들만큼만 하면 되겠지”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죠.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비슷하게 ‘안전한 길’을 선택하려고 고민 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혹시 지금 비슷한 선택을 하고 있다면, 한 번쯤 멈춰서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문득 멍해졌습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지?” 그 질문 하나로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6. 게임 원화, 방황의 마침표를 찍다

답은 단순했습니다. “나는 그림으로 먹고 살고 싶어서 이 길을 왔잖아.”
그 무렵 **‘게임 원화가’**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기획을 시각화하고, 세상을 디자인하는 직업. 그 순간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거라면 할 수 있겠다.”
🔥 방향이 정해지자, 노력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방향에 맞는 노력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입시와 대학에서 쌓아온 기본기는 이미 제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단지 어디에 써야 할지 몰랐을 뿐이었습니다. 목표가 생기자 성장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저는 그렇게 게임회사 원화가로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7. 지금 포기하고 싶은 당신에게
11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그 방황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 저는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재능보다 중요한 건 다시 시작하는 선택이라는 것을요.
만약 지금 그림이 힘들다면, 단순히 ‘재능이 없다’고 결론 내리기 전에 방향을 먼저 점검해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 ✔ 내가 가고 싶은 직업은 무엇인지
- ✔ 지금 연습이 그 방향과 맞는지
이 두 가지만 다시 생각해도 그림을 계속할 이유는 충분히 생깁니다.
🔥 포기해야 할 건 ‘그림’이 아니라, 지금의 방향일 수도 있습니다.
👉 그림 재능이 없다고 느껴지거나, 그림 포기를 고민하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방향을 다시 잡을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재능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한 방향으로 꾸역꾸역 쌓아온 시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조금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마세요. 여러분의 손끝에는 이미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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